500년 세월, 욕망과 체면 속에 살다 간 ‘미스터 아편’의 일대기

아편은 그 비중이 크든 작든 중국 근현대사와 함께해왔다. 서양인들에게 중국은 곧 아편과 동일어였고, 굳이 아편전쟁 때문은 아니더라도 아편이 중국 역사에서 차지한 자리는 상당하다. 역사가들에게 아편은 많은 이야기를 이끄는 매개체다. 하지만 아편과 근대 중국을 연구한 학자들은 대개 아편 수요가 어떻게 발생했는가보다는 아편 교역, 제국주의, 통제 정치 등에 집중했다. 정작 아편 소비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이 책의 지은이 정양원에게 결정적인 열쇠는 두 가지다. 첫째, 아편이 의약품에서 사치품으로 바뀐 시점. 둘째, 여가 활용품으로 쓰이고부터 아편이 전폭적으로 유행한 이유. 즉 외국에서 들어온 생소한 물건인 아편이 중국의 복잡한 소비문화에 안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편 소비를 둘러싼 문화와 정치적 재정의
'중국을 뒤흔든 아편의 역사'는 아편 흡연이 중국으로 도입되고 토착화한 과정을 탐구한다. 즉 이 책은 명 중기에는 미약(媚藥, aphrodisiac)으로, 18세기에는 값비싼 취미이자 ‘양화(洋貨)’로, 청 말 민국기 이후로는 대중문화로 살아온 아편의 인생 역사를 그린다. 혁명보다 먼저 시작되고 더 오래 살아남은 아편은 지난 500년 동안 중국의 국제 관계, 문화, 경제, 정치, 사회를 따라 진화해왔다. 아편은 중국의 역량과 복잡성을 바라보는 효과적인 렌즈다.
아편은 처음 중국에 소개된 이후 15세기에 변화를 겪었고, 18세기에 대중화되었으며, 1800년에서 1860년 사이에 도시화되면서 결국 20세기에 쇠퇴에 들어서는 다양한 국면을 지나왔다. 이 책에는 각 소비 계층이 아편의 유혹에 넘어가는 과정이 각 장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편은 미약에서 물질문화로, 사회적 정체성에서 정치 경제학적 문제로 화려한 사회생활을 누리며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살았다. 또한 아편 흡연은 최적의 장소, 최적의 순간에 들어온 명?청?민국의 경제?사회?문화에 기꺼이 수용되었다.
아편과 중국인의 상호 관계와 영향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데 지은이 정양원이 택한 방식은 전기적 방법이다. 이 방법은 기본적으로 “상품도 사람처럼 사회적인 삶, 곧 인생 역사를 지닌다”(아르준 아파두라이, 이고르 코피토프)는 사고에 기반한 것이다. 중국인들은 사치품부터 필수품까지 아편에 수많은 의미를 부여했고, 이런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누가, 언제, 왜 아편을 피웠는지 가려낼 수 있다.

누가, 언제, 왜 아편을 피웠던가?
중국에서처럼 파이프 흡연이 아편을 피우는 방식으로 계속 이어져 번성한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담배 흡연은 17~18세기에 서유럽과 남아프리카, 자바, 일본에서 유행했다. 그런데 그후 영국과 일본 등지에서는 파이프 흡연이 사라진 반면, 왜 중국에서는 끝없이 재정의하고 중국화되며 번성한 것일까? 지은이 정양원은 이 과정을 추적하는 데 공식적인 역사뿐 아니라 시, 수기, 비망록 같은 필기(筆記)부터 도색적인 잡기(雜記), 음서(淫書), 결혼식 식사 때의 차림판까지 비관습적인 자료들을 샅샅이 찾아내 근거로 삼아 엄숙함과 도덕주의를 벗어나려 했다.
중국인들에게 아편을 피우는 일은 차를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질생활이자 생물학적 행위였고, 음식의 역사이며 소비의 문화였다. 기존에 설탕, 커피, 알코올의 사회사를 연구한 저서들은 많았지만 아편만을 주제로 한 풍속과 문화 분석은 바이 없다는 점에서도 정양원의 연구는 차별성을 띤다. 취향이 계급을 만드는 인자이며 소비가 사회적 차이를 정당화하는 사회 기능을 수행하는 기제라고 파악한 피에르 부르디외의 접근법은 아편의 일대기에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다.

“아편 흡연을 하면서 삼도부(三都賦)를 즐기는 것은 실로 식자층에 의해 재정의된 사치였다. 연기 구름과 인간 구름은 메아리를 형성하여 자신의 경험을 언어로 표현할 줄 아는 자들[지식인]을 만족시켰다. 이것이 바로 아편굴과 매음굴을 오가는 본질이었다.”
― 본문 209쪽, 8장 연기와 가루의 분량 中에서

좌사(左思)의 ‘삼도부’가 문인들의 필독시였음을 고려해볼 때 학식이 깊은 고급 매춘부들이 시중을 드는 아편 파이프는 시를 이해하고 기호화된 언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제한된 것이었고, 또 그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소비가 “도덕 체계이자 의사소통 체계”이며 “교환 구조”라는 신념은 아편 흡연과 잘 들어맞는다. 아편은 중국의 소비 법칙을 잘 드러내는데, 특히 아편 도입 초기에 환관들이 왜 유독 이것에 빠져들었는가를 분석한 대목은 흥미롭다.

환관들은 아편 등을 켜서 아편 덩이를 데우고, 이것을 파이프에 달린 자그마한 아편 사발(그 ‘눈’)에 넣은 다음 주인이 다 피울 때까지 파이프를 들고 있는 일을 했기 때문에 대리 흡연도 시행했다. (……) 환관들은 노련한 흡연가가 되었다. (……) ‘과시적 소비’는 아편의 사회적 삶을 풀면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주제다.
(……)
환관은 궁 안팎에서 언어 폭력과 신체 폭력에 시달렸다. 그들은 번번이 황제, 왕자, 궁녀들의 평판을 위태롭게 하는 각종 사건의 희생양이 되었다. 극단적인 사회?정치적 압박은 그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고통이었다. 같은 운명에 처한 몇몇과 은신처에 모여 몇 차례 순간적으로 아편을 탐닉하고 회고하는 것이 고통을 누그러뜨리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 본문 108~110쪽, 4장 관료 사회 고위직과 하위직의 취미 中에서

이후 동양 특유의 언어 코드인 ‘체면’은 중국에서 아편 확산(문화 형성)과 결합하며 한때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부자가 아편을 피우면, 그것은 곧 교양과 신분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이 피우기 시작하면서 품격이 떨어지더니 급기야 아편 흡연은 범죄 행위가 되었다. 하층계급은 아편의 지위를 가시적이고 사회적인 것으로 만들어놓았고, 지식 계급과 관료들은 흡연을 재해석할 힘이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문인과 환관, 여성, 청소년, 쿨리 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이 아편의 사회적인 삶을 재정의했다. 아울러 아편은 중국에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가져다주었고, 국제무대에 중국인들을 부각시켰다. 청 말기에는 현재의 맥도날드화(McDonalization)와 똑같은 현상이 벌어졌는데, 이 시기 아편 흡연은 쿨리 노동자나 농민 등 중국 최하층 공통분모를 만족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처럼 아편을 사회적?문화적 맥락에 놓고 중국인들이 어떻게 아편 사용으로 복잡한 소비문화를 전개했는지 밝히기 위해 정양원은 아편이 여가 수단으로 탄생한 시점부터 사회적인 상징으로 성장하기까지 과정을 따라간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역사가들에게 아편 이야기는 그들의 관점을 통합하고 연구 방향을 제시한다. 중국 중심의 패러다임 연구가 번성하는 가운데, 아편 이야기는 우리의 시선을 외부와 내부의 힘이 만나는 지점으로 이끈다. 마지막으로 정양원은 아편이 청의 개혁가, 군벌, 깡패, 반란자, 국민당, 일제와 함께 공산 정권에도 부역했음을 주장한다. 비록 30년간 아편이 동면에 들도록 하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공산당 정권 역시 사실은 ‘아편 정권’에 속한다는 것이다.
분화와 변천이 급속도로 진행되는 와중에 아편이 어떻게 살아남고 또 번성하게 되었는지 설명한, 이 책 ?중국을 뒤흔든 아편의 역사?는 역사학과 인류학, 사회학을 공부하는 이들, 그리고 중국에 관심이 있는 모든 독자들을 위한 책이다.

서문

01 연금술사, 성, 궁녀의 기술
02 왕조 교체기
03 캘리코, 차, 아편의 시대
04 관료 사회 고위직과 하위직의 취미
05 취향과 유행 형성
06 아편 소비에 대한 정치적 재정의
07 밖으로, 그리고 아래로의 ‘침투’
08 연기와 가루의 분량
09 아편의 비공식적인 역사
10 민중의 마취제
11 세인트루이스로 가는 길
12 상하이 악

발문